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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치과 일을 하기 전까지, 잇몸 출혈이 전신 건강과 연결된다는 말을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임상에서 환자분들을 직접 보다 보니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양치할 때 칫솔에 피가 비치는 그 순간, 몸이 만성염증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잇몸이 보내는 신호,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제가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그냥 세게 닦아서 그런 것 아닌가요?"입니다. 피가 나는 건 맞는데, 이걸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잇몸 출혈이 2주 이상 이어진다면, 이건 단순한 자극 반응이 아닙니다. 먼저 거울 앞에서 잇몸 색을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건강한 잇몸은 연한 분홍빛을 띠고 이에 딱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빨갛게 부어있다면 세균에 대한 급성 염증 반응이 시작된 단계로 볼 수 있고, 검붉거나 자주색에 가깝게 변해 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검붉은 색 변화는 혈관이 오랫동안 확장되고 정체된 상태, 즉 만성염증(Chronic Inflammation)으로 넘어간 신호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만성염증이란 급성 염증처럼 확 부었다가 가라앉는 게 아니라, 몸 안에서 낮은 불씨처럼 꺼지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염증 상태를 말합니다. 손가락으로 잇몸을 살짝 눌렀을 때 고름이 비친다면, 이미 세균이 잇몸 속 깊이 자리 잡은 것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놓치기 쉬운 신호가 있습니다. 요즘 이가 예전보다 길어 보인다는 느낌, 그게 착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치태와 치석 속 세균이 잇몸 아래 치조골을 서서히 녹이면서 잇몸 라인이 함께 내려앉는 잇몸 퇴축(Gingival Recession)이 진행 중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가 자란 게 아니라 잇몸이 밑으로 물러난 겁니다.
이와 관련해 치은열구(Gingival Sulcus)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잇몸과 이 사이의 작은 틈을 말하는데, 이 깊이가 3mm를 넘으면 세균이 눌러앉는 저장고인 치주낭(Periodontal Pocket)이 생긴 것으로 봅니다. 3~5mm면 초기 치주염, 5mm를 넘으면 중등도 이상으로 분류합니다. 제 경험상 이 단계에 도달하신 분들은 스케일링만으로는 해결이 어렵고, 체계적인 잇몸 치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 잇몸 색이 검붉거나 자주색으로 2주 이상 지속될 때
- 잇몸을 눌렀을 때 고름이나올 때
- 치은열구 깊이가 3mm를 초과했을 때
- 이가 흔들리거나 입냄새가 갑자기 심해졌을 때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치과 방문을 더 이상 미루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잇몸 치료가 전신 건강 관리인 이유
처음에 저도 이 부분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잇몸 문제가 심장이나 혈당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기전을 알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치주염의 대표 원인균인 진지발리스균(Porphyromonas gingivalis)은 잇몸 조직이 헐거워진 틈으로 혈관 속까지 파고듭니다. 이 세균과 세균이 뿜어내는 독소가 혈류를 타고 돌아다니면, 간에서 CRP(C-반응성 단백질)라는 염증 수치를 끌어올립니다. 여기서 CRP란 몸 안에 염증이 있을 때 간에서 만들어내는 단백질로, 전신 염증 반응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건강검진에서 CRP가 3mg/L를 넘게 나왔다면, 잇몸 상태도 함께 점검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질병관리청 국가건강정보포털에서도 치주질환이 세균혈증을 유발해 전신 염증 반응과 연관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잇몸 치료를 받은 뒤 CRP 수치가 낮아졌다는 임상 보고도 있어서, 치주염 관리가 곧 전신 염증 수치를 낮추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당뇨가 있는 분들에게는 특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치주염이 있으면 혈당 조절이 더 어려워지고, 반대로 혈당이 높으면 잇몸병이 더 심해지는 악순환이 보고됩니다.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에서 치주염 동반 비율이 높다는 연구도 있는데, 진지발리스균이 만드는 특정 효소가 관절을 공격하는 자가면역 반응과 얽혀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출처: PubMed Central, 치주염-류마티스 관절염 관련 연구).
제가 임신 계획이 있는 환자분들께 꼭 미리 치과 치료를 받으시라고 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임신 중에 치과 치료가 제한적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잇몸 염증이 혈류를 타고 퍼지는 것 자체를 막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제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진료실에 오셔서 "약만 처방해 주세요"라고 하시는 분들이 꽤 계십니다. 고혈압 같은 만성 질환은 약으로 수치를 조절할 수 있지만, 잇몸 만성염증은 약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인사돌이나 이가탄 같은 잇몸약을 드시다가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를 정말 많이 봤습니다. 잇몸약은 치과 치료와 병행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고, 치과 치료를 주기적으로 잘 받고 계신다면 사실 잇몸약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점을 꼭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양치할 때 피가 나는데 그냥 두면 괜찮아지나요?
A. 일시적인 자극으로 한두 번 나는 것과 달리, 2주 이상 반복된다면 자연적으로 좋아지기 어렵습니다. 잇몸 세균이 조직 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신호일 수 있어서, 이 단계에서 치과를 찾으시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 방법입니다.
Q. 인사돌이나 이가탄 같은 잇몸약을 먹으면 치주염이 나아지나요?
A. 잇몸약은 치과 치료와 병행할 때 보조적인 역할을 합니다. 약만 드시면서 치과 치료를 미루시면 치주염이 더 진행될 수 있습니다. 제가 진료실에서 가장 걱정하는 패턴이 바로 이것입니다. 치과 치료를 정기적으로 받고 계신다면 사실 잇몸약을 따로 드실 필요가 없습니다.
Q. 잇몸 치료를 받으면 전신 염증 수치도 낮아지나요?
A. 치주염 치료 후 CRP(C-반응성 단백질) 수치가 실제로 낮아졌다는 임상 보고가 있습니다. 물론 잇몸 치료 하나만으로 모든 전신 염증이 해결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잇몸 염증을 제어하는 것이 전신 염증 수치를 낮추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결론
잇몸이 보내는 신호는 생각보다 솔직합니다. 검붉은 잇몸 색, 출혈, 이가 길어 보이는 느낌, 이 모든 것이 몸 안에서 뭔가 진행되고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제가 임상을 통해 분명히 느낀 것은, 잇몸 치료를 제때 받은 분들이 그렇지 않은 분들에 비해 전반적인 건강 관리에서도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입니다.
약 처방만 원하시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잇몸 만성염증은 약으로 해결되는 종류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기적인 치과 검진과 스케일링, 그리고 필요하다면 잇몸 치료를 받는 것이 심장, 혈관, 혈당까지 함께 챙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잇몸 하나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